우리는 가끔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위해 시작했고, 왜 하는지를 망각한 채 해오던 대로, 익숙한 습관대로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오후의 특별한 미사에 참례하려고 새벽 미사를 하지 않겠다고 공동체에 알렸습니다. 그런데 습관대로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에 눈이 떠지니 새벽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의아해하며 “왜?”라고 묻는 수녀님에게 “습관으로 온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침을 미사로 시작해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왜 이 시간에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20여 분을 걸어 미사에 왔을까?’ 곰곰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새벽 미사 참례가 수도 생활로 익숙해졌음에 감사하는 한편으로는 간절함이나 소중함을 놓치고 있는 저를 알아차린 것입니다. 최근 한글로 출간된 ‘왜 굳이 기도하는가?’라는 책에서 리처드 레너드 신부님은 “기도는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기도하면서 추구하는 우리의 목적은 사랑 넘치는 하느님의 현존을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기도는 공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상적인 의례가 반드시 그 의례가 가리키는 중요한 관계를 심화시키지는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얼마 전 미사 강론에서 들은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왜 주변에 변화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까 하고 묻는 이에게 “기도가 관계를 방해한다면 기도를 버려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는 하는데 미운 사람은 여전히 밉고 못마땅한 사람은 여전히 못마땅하고, 하나도 변화가 되지 않는다면 기도를 버리십시오.”라고.
전례나 기도가 내 삶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정한 기도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단지 성당에 앉아 있는 시간으로 영적인 만족감을 얻으며 마치 충분한 의무를 다한 것 같은 착각 속에 있는 신심 행위, 레지오 마리애에 참여하면서도 관계에 소홀하며 보고에만 급급하다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일까에 대해서요. 성모님처럼 곰곰이 머물러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이 성모성월에 성모님처럼 곰곰이 마음에 새기며 나에게 물어봅니다. ‘주님의 말씀이 너 안에 흘러넘쳐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나는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얼마나 귀 기울여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리고 있는가?’
성모님은 깊은 응답으로 참 인간적이며 헌신적 고뇌와 활동으로 초대하고 계시는데 마땅하고 옳게 응답하고 있는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마리아 관련한 이야기는 주님 탄생 예고 응답,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주님 탄생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 예수님을 잃어버리심, 그리고 예수님을 찾으심 등 환희의 신비가 이어집니다. 교회는 전례력으로 매주 토요일을 제외하고라도 성모 마리아께 맞춘 24개의 보편적인 축일, 기념일이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성모님이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동반자이며 예언자이심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성모님처럼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있음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행성 지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생태 사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 오월에 성모님과 함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매일이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