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나훔 예언서
여한준 롯젤로 신부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대구 Se. 담당사제

시대 배경의 이해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아시리아는 백 년간 남왕국 유다를 비롯하여 많은 약소국가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나일강, 페르시아만부터 지중해까지 정복한 아시리아는 정복한 땅의 민족들을 마구 짓밟았습니다. 이와 같은 아시리아의 잔혹한 만행을 나훔 예언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3,1)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오르는 병거,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3,2-3 참조) 
그야말로 아시리아는 불의와 폭력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점차 그 세력이 기울게 된 아시리아는 기원전 626년 메디아와 바빌론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고, 기원전 612년에 수도 니네베가 함락되면서 기원전 606년에 최후를 맞이합니다. 나훔서는 아시리아의 멸망 전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곧 나훔 예언자는 하느님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진노의 막대’이자 ‘심판의 도구’였던 아시리아가 온 세상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느님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몰라보며 자신이 주인인 양 착각한 아시리아의 교만과 기만을 고발하며 아시리아에 징벌을 예고합니다.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열정을 지니신 분,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 진노하시는 분이시다.”(1,2) 나훔은 시작부터 보복이라는 하느님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열정과 진노, 화를 터뜨리시는 하느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계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을 향했던 하느님의 진노가 이제는 온전히 니네베를 향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복수하시는 하느님’, ‘보복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어떻게 보입니까?
혹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고 가르치신 하느님과 다른 분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시편 94편 1절에서도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 보복하시는 하느님, 나타나소서.”라고 노래합니다. 과연 우리는 보복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에서 하느님의 복수를 거론할 때는 올바른 재판과 정의로운 심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 재판에서 판사가 불의하고 불공정하다면 힘없는 피해자는 아무런 보상도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며, 힘 있는 가해자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세상을 누비게 됩니다. 그런 곳에 정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훔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바로 니네베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으시는 정의로운 분이시며, 보복의 의미는 불의를 꺾고 정의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이유없이 복수를 토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연한 불의 앞에서 정의를 세우기 위한 하느님의 방책이 복수입니다.

정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온 세상 만물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주인으로서 공의롭고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나훔서는 “그분 앞에서 산들이 떨고 언덕들이 비틀거린다.”(1,5)라며 그분의 놀랍고 위대한 능력을 찬미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2,1) 
대제국 아시리아의 폭력과 만행 앞에 힘없고 약한 나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폭력을 휘두르는 대제국보다 더 강한 분이 산을 넘어오십니다. 이 소식이 아시리아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이겠지만 유다에게는 원수의 멸망과 자신의 구원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이제 아시리아에 남은 것은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처분뿐입니다. 니네베는 불안에 떨고, 왕후는 끌려 나와 사로잡혀 가고 시녀들은 비둘기 소리처럼 한숨지으며 가슴을 칩니다. 아무리 “멈추어라, 멈추어라!”하고 소리치지만 돌아보는 자 아무도 없으며, 심장은 녹아내리고 무릎은 후들거리며 허리는 모두 떨리고 얼굴을 죄다 하얗게 질립니다(2,7-11 참조).

위로의 예언자 나훔
다른 예언서들과 달리 나훔은 민족의 타락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힘을 악용한 아시리아를 고발하고 있으며, 심판의 징벌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아니라 수도 니네베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복으로 하느님의 정의와 통치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억압과 핍박에 시달리던 유다는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가해자에게는 보복의 심판이 되고, 피해자에게는 위로와 보상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예언자 나훔(נחום)의 이름은 ‘주님께서 위로하시다.’ 또는 ‘위로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나훔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며 사람을 억압하는 권력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대항하며 자신이 역사의 흐름을 결정할 수 있다는 지도자, 물질적 풍요로움에 자신의 배를 채우고 교만해져 의기양양 하느님께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에게 하느님께서 정의의 활을 당기시고, 올곧은 자들에게 안식처가 되신다는 위로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사실 니네베는 단순히 한 도시만이 아니라 주님을 거슬러 일어난 모든 나라의 전형입니다. 어지럽고 혼탁한 사회,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한 세상을 바라보면 원칙과 규정 위에 인맥과 관계가 있고, 옳고 그름의 기준보다 나의 편과 남의 편이란 기준이 더 중요하며, 선과 악의 구분보다 ‘좋다와 싫다’로 가치를 판단하는 세태를 마주합니다. 그래서 힘만 있으면 아무리 악해도 처벌받지 않고 당당히 세상을 활보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정의가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다”(루카 1,52 참조)라고 노래하신 성모님을 따르는 군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을 보내며 작고 어리고 나약했지만, 하느님의 정의를 믿으며 하느님의 통치에 모든 희망을 걸었던 성모 마리아의 신덕을 청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