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2)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 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지난달에 이어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추기경님을 생생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교회와 시대의 어른이었던 그분을 우리 교회는 ‘복자’품에 올리고자 준비 중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이나 복자가 되기 위한 기준은 그 사람이 ‘대신덕’(=향주삼덕)과 ‘대인덕’(=사추덕)을 지녔는가 하는 판단입니다. 

향주삼덕
세례로 그리스도와 결합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합니다. 인간적 덕은 은총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덕들은 향주덕(向主德)에 뿌리를 두고 있고, 하느님과 직접 관계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세 가지 향주덕의 근원과 동기와 대상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믿음이란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것, 그리고 거룩한 교회가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게 하는 덕입니다(1814항). 희망이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고,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은총의 도움으로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 덕입니다(1817항).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란 하느님만을 위해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게 하는 덕입니다(1822항). 향주삼덕을 자기 삶 안에 체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추기경님의 성품과 영성은 언제나 이 기준을 향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믿음, 희망, 사랑
추기경님의 믿음은 자신이 순교자 후손임을 자각하는 데서 나왔고, 신앙의 뿌리는 순교 영성이었습니다. 순교자 후손답게 추기경님의 삶에서 신앙은 중요합니다. 사실 추기경님은 원래 신부가 되려는 열망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뜻이 분명하다면 신앙을 통해 겸손하게 순명했습니다. 이는 사제 서품식 중 했다고 알려진 기도에 잘 드러납니다.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신앙으로 순종하는 추기경님 모습은 성모님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선택해서 그 처녀를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는 마리아의 응답이었고, 동시에 믿는 모든 이들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은총이란 무엇이고,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에서 마리아는 우리에게 중요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하느님 구원계획 앞에서 우리는 마리아처럼, 김 추기경처럼 ‘신앙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서도 다 이룰 수 있으시지만, 인간이 순응하고 협력한다면 은총을 체험하고 구원에 이릅니다. 신앙의 신비를 추기경님은 알았고, 믿었으며, 살았습니다. 
추기경님은 어렵고 궁핍한 사회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고, 교회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교 희망은 현세에 국한되지 않지만, 현실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기경님은 복음을 입으로 전하고,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희망은 언제나 신앙에 근거한 희망입니다.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로마 4,18)한 것처럼 추기경님 역시 수많은 고난과 시련 중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갈망하며 어두운 세상에 빛을 증언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신약의 새 백성은 십자가 희생 제사를 통해 새 계약을 맺었고, 예수님은 계약 실천 사항으로 사랑의 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중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는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추기경님은 일생 동안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사실 추기경님의 사랑 실천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습니다. 
1951년 첫 사목 발령지인 안동 본당에서 가난한 주민들을 꾸준히 도왔고,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었으며,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 상황에 가슴 아파하며 북한 동포들을 향한 마음을 자주 표현했습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한 기도 중 매 미사 파견에 세 번째 십자 표시는 그들을 향했습니다. 추기경님은 자신이 실천하고자 했던 사랑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 전체 차원으로 확산되도록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를 설립했습니다.

성체성사의 삶
추기경님의 주교직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입니다. 이는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겠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추기경님은 평소 밥의 비유를 여러 번 하셨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명쾌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셨고, 그 몸을 먹음으로써 우리는 살아가게 됩니다. 빵이 그렇고, 밥이 그렇습니다. 추기경님은 예수님처럼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그들에게 힘을 주고자 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스스로 밀알이 되고자 했고, 꽃을 피우고자 거름이 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추기경님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추기경님은 자신을 ‘바보’라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바보다.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 자신을 ‘바보’라고 규정한 이유는 무한하신 하느님 신비 앞에 놓인 인간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했던 추기경님 자신의 깨달음을 고백한 내용이고, 이는 동시에 겸손하고 더 낮게 살기 위한 다짐입니다. 스스로 ‘바보’라 부른 추기경님의 사랑과 나눔 정신을 이어 가기 위해 선종 후 1년 후인 2010년 2월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이 설립되었습니다. 일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사회 정의를 위한 버팀목이 되었던 추기경님의 정신을 기리는 단체입니다. 
추기경님은 죽은 다음에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작성했던 유언대로 선종 직후 각막 기증을 통해 환자 2명의 눈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신비를 깊이 묵상했고,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내어주는 삶,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삶을 죽기까지 실천했습니다. 추기경님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에 따라 가장 낮은 곳에서 온전히 자기를 내어주는 성체성사의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했고, 수많은 결실을 맺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