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나눔’
역사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
허영엽 마티아 신부 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 여기인 현재에 살아 있고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며 산다. “역사(歷史)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1950년, 지금부터 꼭 75년 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을 치밀하게 계획한 북한 정권은 전쟁 시작 후 고작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계속해서 밀려나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으로 고군분투(孤軍奮鬪)한다. 대구와 진해가 함락될 위기에 놓여 일본의 망명정부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힘겹게 북한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획기적인 반전을 이루고 전세는 역전된다. 9월 28일 서울을 되찾고 10월 1일 38선을 돌파해 불과 몇 주 만에 북쪽 압록강 국경까지 도달한 부대도 있었다. 그런데 수십만 명의 중공군의 공세로 10월 말부터 다시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했다. 1·4 후퇴로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고 텅 빈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야간 공격 등으로 연전연패하며 북위 37도선 밑까지 밀려난 유엔군과 한국군은 무엇보다 중공군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다. 전쟁과 전투에서는 사기가 중요한데, 중공군이 한밤중에 피리를 불며 꽹과리와 북소리와 함께 공격을 계속하면 결국 어느 한쪽 전선이 무너지고, 허물어진 곳으로 물밀듯이 들어와 아군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 의식을 떨치고 다시 사기를 올려줘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평리 전투’이다. 나는 책을 읽다가 지평리라는 지명이 낯설지 않았다. 어릴 때 방학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양평 공장에 놀러 가곤 했다. 아버지가 직원들에게 막걸리를 사다 준다며 나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간 곳이 바로 지평리였다. 지평리는 예로부터 양조장이 있어 막걸리로 유명한 장소였다. 사활을 건 전투가 펼쳐진 그곳이 어릴 적 보았던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했던 그곳 지평리였다니, 하며 깜짝 놀랐다.

중공군에 대한 패배 의식을 떨치고 전쟁의 흐름을 바꾼 ‘지평리 전투’
지평리(砥平里)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계속되었는데 방어 인원이 적어 산 쪽보다는 평야 지역에 미국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가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한밤중에 사방에서 떼 지어 공격하는 10배가 넘는 숫자의 중공군을 결국 물리쳐서 유엔군과 한국군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아준 중요한 전투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버금가는 승리의 자신감이었다. 특히 프랑스대대의 지휘관은 본래 중장이었으나 프랑스가 대대를 파견하기로 했기에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을 자처한 프랑스의 영웅 몽클라르 장군이었다. 지평리 방어 원형 지역 중 돌출된 지역을 프랑스대대와 이에 배속된 한국군이 지켰다. 중공군은 몇 번의 공세를 취해보고 프랑스대대가 지키는 곳이 취약점인 것을 판단하고 이곳을 중점적으로 무차별 공격을 계속했다. 
당시 대대장인 몽클라르는 이미 59세로 1, 2차대전을 거치며 다리를 다쳐 지휘봉 대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런데도 밤이 되어 전투가 시작되면 몽클라르 장군은 지휘소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를 직접 다니며 지휘했다. 베레모를 쓰고 머플러를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전장 곳곳을 누비며 작전을 지시하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와 함께하는 군인들은 한눈에도 큰 자부심이 있었고 지휘관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표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대를 지휘하며 계속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영웅의 기상이 넘쳤고 승리의 확신이 담겨있었다. 전투에 참여했던 한 한국군 병사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프랑스대대에 배속된 우리 한국군은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어 처음에는 군수품을 나르는 일이나 하는가 했지만, 몽클라르 장군은 한국군을 한 개의 중대로 만들어 프랑스 병 사이사이에 포진해 싸우게 했다. 밤이 되자 피리 소리, 나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꽹과리, 북소리와 중공군의 거친 함성과 발자국 소리가 합쳐져 극도의 공포로 가득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온몸이 떨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는 것이 아닌가? 옆을 돌아보니 프랑스 병사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군들은 중공군이 철조망을 넘으려는 찰나 어둠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퍼붓는 총소리에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았고 나는 앞을 보지 못하고 참호에 머리를 박은 채 공중을 향해 발사했다. 그때 옆의 프랑스군이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자기를 따라 하라는 몸짓을 하였다. 마치 큰형님이 여기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참호 밖을 직시하며 중공군에게 사격을 시작했다. 그때 머플러를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높은 구릉을 오르내리며 지휘하는 몽클라르 장군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감격에 울컥했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중공군이 후퇴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프랑스 군인들은 소총에 착검을 하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국땅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 싸우고 쓰러져간 파란 눈의 청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일설에 따르면 몽클라르 장군의 통역병은 신학생 출신으로 라틴어로 대화하고 통역했다고 한다.

이국땅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 죽어간 외국 젊은이들을 기억해야
한국 전쟁하면 학창 시절 시험에도 항상 나왔던 전투 병력을 지원했던 나라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프랑스, 그리스, 튀르키에,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태국,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등 16개국은 알고 있었지만 인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서독 등 6개국이 의료지원을 했고, 바티칸을 비롯한 38개국이 재정과 물자지원을 했다는 것을 처음 알아 조금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싸웠던 유엔군 사망자는 3만7,902명에 달한다. 유엔군 실종자와 포로는 각각 3,950명, 5,817명이며 부상자는 10만3,460명이다. 
이처럼 시간이 흘러도 우리나라는 너무 많은 빚을 외국에 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름 모를 나라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누군가의 금쪽같은 아들이었던 외국의 젊은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매일 하는 기도 중에 자주 그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분명히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주님께 우리나라를 위해 전구해 주셨으리라 믿는다. 당시의 전쟁 상황에서 자칫 세계지도에서 대한민국이 지워질 뻔했다.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이런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라틴어 격언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지 못하면 오히려 평화를 빼앗긴다는 역설적인 말로 오랜 역사 동안 외국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던 우리가 늘 새겨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