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발견하셨던 분은 그 누구보다도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삶의 무게를 스스로 인내하시고 감내하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 주었던 장면을 바라봅시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26-33)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것도 결혼할 사람이 정해진 처녀가 말입니다. 어린 처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자신의 약혼자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부모에게 말을 꺼내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체면은 고사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숨겨두기에는, 감추기에는 마리아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기뻐하여라!”라고 인사합니다. 기뻐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어쩌면 성경의 저자는 마리아의 마음을 “몹시 놀랐다.”라는 다소 건조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들을 기억해 내
하지만 마리아는 그 두려움 안에서도 천사에게 거부 의사를 표현하기보다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통해 마리아는 일생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들을 분명 기억해 내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두렵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구원해 주시고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하느님을 마리아는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천사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 말을 몸으로 체험하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믿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금의 이 상황도 두려움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두려움 속에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의 뜻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래서 기뻐할 수 없는 이 일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믿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가 일상에서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믿었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고 사는 이는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며 인생을 기쁘게 삽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그분께서 자기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다고, 그분을 찬송하며 행복을 노래합니다(루카 1,46-48).
성모님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만나만 먹는다고, 더 많은 만나를 달라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않습니다. 만나를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이슬로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에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성모님은 단순히 잉태의 순간뿐 아니라 당신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십니다.
성모님의 삶은 어쩌면 고통과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서 먼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찾아갈 때도(루카 1,39-45), 만삭의 몸을 이끌고 요셉과 함께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갔지만 묵을 방이 없어서 헤매다 결국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출산하였을 때도(루카 2,1-7), 어렵게 얻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살해하려는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고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올 때도(마태 2,13-23), 율법에 따라 예수님을 봉헌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지만 고통과 아픔으로 점철된 삶을 알려주던 시메온의 예언을 들었을 때도(루카 2,25-35), 며칠 동안을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면서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하면서 찾은 아들의 황당한 대답을 들으면서도(루카 2,41-52),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위해 자신의 품을 떠났을 때도, 처음으로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셨을 때도(요한 2,1-12), 걱정되어 아들을 찾아갔지만 가멸차게 외면하였을 때도(마태 12,46-50), 그리고 마지막으로 먼저 사랑하는 아들의 모욕과 수난, 죽음과 끝을 바라보았던 어머니로서의 모든 삶이 고통과 아픔으로 물들어져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성모님처럼 고요함을 찾아봅시다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도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믿은 성모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위로를 얻고,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미움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고 기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우며 희망을 줍니다. 미운 사람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복음은 바로 세상에 대한 신뢰를 일으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모님은 복음의 원천에서 살아가셨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기뻐하소서!”하고 인사한 것은 성모님의 이런 복음적 삶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먼저 생겨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망치고 회피하고 포기하고 절망하지는 않습니까? 우선 성모님처럼 고요함을 찾아봅시다. 지금의 불행과 고통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하는 고요함과 여유를 가집시다. 그 고요함 안에서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셔주심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뜻과 선물을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계심을 우리는 발견하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은총과 선물이 무엇인지 발견합시다. 만약 그 선물을 지금 깨닫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그 사랑을 믿고 신뢰하며 오늘을 인내하고 내일을 희망하면 됩니다. 그럼 어쩌면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에게 천사가 말을 건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언제나 너와 함께 계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