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 그런데 조금씩 자라면서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사실이다. 그럼 성모 마리아님을 어떻게 부르면 더 실감이 날까? 사람들 앞에서 엄마 마리아님? 좀 어색하다. 속으로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엄마! 마리아님!”
그렇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유언을 남기셨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이렇게 제자들이 엄마를 자기 집에 모신 교회의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래서 교회의 품 안에서 나도 ‘엄마 마리아님’을 내 마음의 집에 모시듯이 하면서 살고 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태중에서 태어나셨다. 우리와 같이 육체를 지닌 완전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흥미로운 복음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마르 14,49)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육화의 신비가 완성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대목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인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님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던 이방인 백인대장이 그 숨을 거둔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 복음서는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생각해보자.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그 생명을 함께 누리고자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였고, 생명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하느님과 함께 살던 그곳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생명은 사라지고 죽음이 찾아왔다. 아담과 하와가 자초한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온갖 위협을 당하면서, 위태롭게 생존하고 있다. 마침내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일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여기에 참 생명이 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친밀하게 지내는 것에 인간의 참된 행복과 기쁨이 담겨있다.
왜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한 중심에 있는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다. 어머니께 잉태되고 그분이 젖을 빨리고 키우셨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그 어머니는 시신을 거두셨다. 그런데 그분이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만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어머니 마리아께서도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아드님을 만나셨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 때,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도록 해주셨다. 우리와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결정적인 선물을 남기신 것이다. 그 성체성사의 신비에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미 참여하기 시작하셨다. 그 신비의 선물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였지만, 성모 마리아는 자신 앞에서 펼쳐지고 있던 구원의 드라마의 절정을 엄숙하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모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되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요한 3,16). 그것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벌이신 일이다. 성령을 통해서 이루신 일이었으니까(루카 1,26 이하). 그런데 인간인 성모 마리아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이렇게 하느님을 떠난 인간, 그래서 죽음을 겪고 온갖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찾아서 오신 하느님이시다. 왜?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2베드 1,4).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우리는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 믿음도 선물로 받은 것이기에 성모 마리아와 함께 주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지금 조용히 내 입술을 조심스럽게 우물거리면서 성모 마리아를 향해서 “엄마”라고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