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 ‘달생(達生)’ 편에 나오는 ‘목계지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계(木鷄)란 나무로 만든 닭이라는 뜻입니다. 즉, 나무로 만든 닭처럼 완전히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의 능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냥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손해 볼 것도 없잖아!” 제 신앙의 출발점은 마치 세상의 잣대인 경제 논리와 흡사할 만큼 소소한 믿음(?)과 즐거움, 재미였습니다. 특별히 성가에 대한 호기심은 굉장했습니다. 그레고리안의 선율은 대학 시절 서양음악사 수업에 듣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고, 미사곡을 새로이 배우며, 전례 및 교리를 알아가는 지적 호기심의 충족도 색다른 재미였습니다. 더 나아가 봉사에 대한 약간의 우쭐함(?)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레지오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인 30대 남성은 교회에서 두 팔 벌려 환영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주 레지오와 성가 연습을 하며 성당에서 재미를 갈구하며 살았습니다. 30대의 매뉴얼화된 생활 속에서 교회 생활은 상위차원의 재미를 주었는데 이는 마치 학창 시절 개신교 시절을 떠올릴 만큼 벅찬 기쁨이 넘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다 젊은 레지오 단원의 숙명과도 같은 쁘레시디움 서기를 맡고 나서 처음으로 레지오의 빠듯한 규율을 맞닿았고, 처음으로 꾸리아 월례회의에 참석했을 때, 그 긴장감과 살벌함에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업 보고 준비의 두근거림은 지금은 좋은 추억입니다. 꾸리아 간부는 마치 두려운 상사와 같고, 엄청나신 신앙의 소유자로 여겼던바, 범어성당에 정착 후 처음으로 꼬미씨움이라는 평의회를 접하게 되었을 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우주적 존재로 여기곤 했습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인가? 본당에서 성가대와 레지오를 함께하던 중, 꼬미씨움 서기로 봉사해달라는 기대치 않은 권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실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겁 없이 선뜻 승낙하고, 그렇게 5년 정도 꼬미씨움 서기를 하는 동안 책임감보다는 서기직이 주는 근사함에 더 취했다고 할까? 그 시기 세나뚜스 월례회의 날짜도 잊고 결석할 만큼 지금 생각하면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간부였습니다.
레지오 간부 하며 부족한 책임감, 소통, 침묵 배워
제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던 지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꾸리아 단장을 맡게 되면서 솔직히 같잖은 자부심에 취해 단장직을 수행했던 것 같습니다. 제 성향이 (제 직업적 특성이기도하지만) 남들과 소통하기보다는 혼자 결정하다 보니, 단장을 수행하는 것은 서기로 봉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길이었습니다. 봉사하며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왜 너는 혼자 모든 일을 하냐”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꾸리아 단장 역임 중 3간부가 모두 사임한 일이 있었습니다. 혼자 월례회의를 진행하면서 묵주기도 중에 울컥한 기억도 있습니다. 간부가 선출되지 않는 시기가 지속되자 그 자괴감은 이루 말도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6년간 봉사하며 소통을 배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주임 신부님의 거부할 수 없는 권유로 제가 감히 생각도 못 한 꼬미씨움 단장으로 봉사해야만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와 동시에 기존 꼬미씨움 간부의 이탈이 이어졌습니다. 이해는 되었습니다. 물론 저의 부족함이 가장 크겠지만, 임기를 시작도 전에 교회 내에서도 잡음이 조금씩 들리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40대 중반의 꼬미씨움 단장과 봉사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할 만도 하다 싶었습니다.
3년 동안의 꼬미씨움 단장 임기 중 제가 배운 것은 침묵이었습니다. 저의 신앙생활의 시작은 기쁨과 즐거움이었는데 이제는 침묵이 그 의미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간부의 부족함이 보일 때도, 적반하장으로 저를 나무라고, 어이없이 간부의 본분을 잊을 때도, 제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침묵과 그를 대신하는 솔선수범이었습니다. 레지오 간부를 하며, 제가 부족한 책임감, 소통, 침묵을 배워갔습니다.

목계는 제 삶의 지향점이었습니다. 어떠한 삶의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 닭. 15년의 간부 생활로 조금은 목계에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타인이 볼 때는 약간은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으나, 제 옆에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매 순간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를 살며 직면하는 상황마다 ‘예수님, 진짜 이건 아니지 않아요?’, ‘예수님, 왜 제 주위에는 저런 사람만 있나요?’, ‘왜 이리 일을 꼬이게 하시나요?’와 같이.
어쩌다 지금은 세나뚜스 부단장입니다. ‘이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 말하면서 봉사 중입니다. 담백하게 써 내려가다 보니 저에게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뜻이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마치 소돔성을 떠나는 롯과 같이.
최근 다녀온 성모 발현 성지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15분마다 종이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울리는 종소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우리 자신을 깨우는 소리라 합니다. 의지와 유혹에 약한 제가 한순간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도록, 부족한 저를 하느님께 향하라 명하시는 듯합니다. 기도할수록 모든 것이 저로 인함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주님이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하느님을 잘 모르겠습니다. 마치 저를 깨우는 종처럼 매 순간 되뇝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도 향하고 있나요? 당신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제가 커짐(성공)에 감사하는 사람보다는 제가 작아짐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되길 희망하며 지금도 당신과 대화합니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 신진욱 볼루시아노
- 꼬미씨움 단장 재임시 성모의 밤
- 대구 의덕의 거울 세나뚜스 800차 월례회의 축하식
- 범어성당 성지회 회원들과 함께
- 스페인 성가정성당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