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훈화
사순 제2주간-
주님 수난 성지주일, 성주간
이금재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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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재 마르코 신부는 전주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받았고, 현재 전주교구 상담사목센터장으로 소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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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3월 1-7일)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사람들은 온갖 역경과 고통의 시간을 걸어가면서 더욱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두려움과 무서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마음에 병이 들고, 우울증이 발생하면서 삶을 더욱 악화시키거나 좌절하면서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겪은 다양한 사건과 역경, 그리고 고통의 상황들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절망하지 않고 믿음의 뿌리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가시며 성장하신 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걸어오신 그 삶에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과 고통의 순간들, 두렵고 절망적인 순간들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이 겪는 가장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순간, 바로 아들이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내몰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모님은 그 고통과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믿음에 뿌리를 두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견디어 내며,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성모님을 믿음 안에서 성장시킨 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삶의 최전선에서 성모님처럼 살고자 하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사순 2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처럼 묵묵하게 온갖 역경과 고통의 시간을 걸어가시는 레지오 단원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하고, 연대하면서 힘을 주시겠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길을 이미 걸어오신 성모님께서도 함께하시며 레지오 단원들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절망적이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 불안하고 두려운 삶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보며 다시 일어섭시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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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3월 8-14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충만한 마음”(요한 4,14참조)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가 벌인 홀로코스트(집단 수용소에서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의사이며 심리치료사인 빅터 프랭클은 인간을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 이해하며, 의미가 좌절될 때 ‘실존적인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실존적 공허감’은 결국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의미, 즉 이유를 못 찾는 것으로 인생을 좌절과 절망, 그리고 허망한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통에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면 살아가는 힘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핸드폰과 유튜브 영상 그리고 알코올(술) 등에 빠져서 중독되다시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사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거나 ‘실존적 공허감’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육체적으로 무엇을 채우고자 하지만 정말 채워야 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말씀과 하느님의 사랑’을 채우지 않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적인 것으로만 채우려고 합니다. 그럴수록 마음과 영혼은 더욱 목마르고, 공허감이 더 커지며 심지어 외로움과 소외는 커지고 결국 좌절과 절망으로 삶을 망치게 됩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늘 기도하는 까떼나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루카 1,46) 이 외침은 마리아가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충만해진 마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내 삶에, 내 마음에, 내 영혼에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채우고 있었고, 내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왔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하느님 중심으로 다시 설정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에 의탁하며 ‘실존적 충만함’을 느껴 봅시다.
오늘 우리도 마리아처럼 노래하고, 외칠 수 있도록 영원한 목마름을 없애주고, 충만한 행복의 삶을 보여주는 하느님께 한발 더 나아가는 회개의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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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3월 15-21일)
‘참된 사랑의 시작’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에게 단 하나의 단점은 바로 눈썹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고, 눈썹이 지워질까 노심초사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고, 둘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눈썹 때문에 항상 불안했습니다. 여자는 자기만의 비밀을 지키면서 행여나 들키면 어쩌나, 그래서 따뜻하고 다정한 남편이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하고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삼 년이란 세월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되어 둘은 길거리로 내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리어카의 연탄재가 날아와 여자의 얼굴이 온통 검댕이가 되었지만 여자는 닦아낼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자기의 비밀이 들킬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다가와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의 눈썹 부분만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의 다른 부분을 모두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웃으며 남편은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단점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조용히, 그리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많은 도움을 줍니다. 성모님의 군단에서 레지오 단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요? 다른 사람들의 약점과 실수와 잘못 등을 감싸주고, 품어주고, 도와주며 성모님처럼 살아가나요?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사랑은 눈썹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아내의 얼굴을 닦아준 남편처럼 상대방의 단점과 약점과 실수와 잘못을 못 본 척 넘어가 주고, 마음으로 품어주고, 비밀을 지켜주고, 용서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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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3월 22-28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우리 시대에, 우리와 함께 살다가 급성 백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최근 성인품에 오르신 15세 소년 성인 카를로 아쿠티스(1991~2006)는 “성체는 영원한 행복의 하느님 나라로 가는 고속도로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성체의 의미와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성인은 7살에 첫영성체를 하고 난 후부터 선종하기까지 8년 동안 매일 성체를 모시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성체를 모시기 위한 미사에 가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이었다고 합니다. 그 소년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콘서트나 축구장 앞에는 줄을 서지만, 성체 앞에는 줄을 서지 않아요.”
소년 성인은 사람들이 잠깐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콘서트장이나 축구장 같은 곳은 열심히 찾아다니고 줄을 서지만 성체 앞에는 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성체 앞에 줄을 선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 줄을 서는 것이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매일 우리를 만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당신 앞으로 걸어 나오길 기다리십니다. 마치 죽음을 통해서 어두운 동굴 무덤에 갇혀 있는 라자로에게 당신 앞으로 걸어 나오도록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부르듯이 우리에게 “성체 앞에 나와라.”하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무덤 동굴에서 나왔을 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하고 말씀하며 삶의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도 누구든 미사 안에서 성체 앞으로 걸어 나온다면, 매일 성체조배를 하며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고, 맡기며 하루를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삶의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성체 앞에 줄 서지 않았고, 성체 앞에 앉아서 기도하지 않았던 내 모습을 반성하며 오늘부터 성 아쿠티스처럼 성체 앞에 걸어 나가 줄을 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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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 성주간(3월 29일-4월 4일)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들어가기’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가 쓴 ‘프레임’이라는 책에 ‘모든 출구는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다’라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출구를 볼 때마다 ‘아, 어디로 들어가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을 좀 더 확장해서 신앙적으로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매일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도, 심지어 죽음도 결국 하늘나라로, 하느님께로, 하느님의 계획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입니다. 
어느 날 나자렛의 시골 동네에 살던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하느님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 말씀과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저는 이제 제 의지와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아직은 잘 모르지만 하느님의 계획안에 제가 들어가겠습니다.’하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드디어 성모님이 되었고, 아들 예수님과 함께 수난과 고통과 죽음의 길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획안으로 들어가고, 하늘나라의 입구를 향해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입구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제 부활을 앞둔 성주간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 죽음의 길이라는 출구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계획안에 들어가는 길은 때론 이렇게 험난하고, 많은 고통과 죽음이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놀라운 신앙의 신비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겪는 수많은 고통과 죽음은 바로 그 길을 이미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결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우리 단원들도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잊지 마십시오. 내가 살아가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을.